안동 출신의 문신인 류후장의 시문집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류성룡, 할아버지는 류원지(柳元之), 아버지는류만하(柳萬河)이다. 류원지, 류세명(柳世鳴), 홍여하에게배웠다. 18세에 홍여하에게 서 수학할 때 스승이 류후장의 『주역(周易)』에 대한 조예가 깊다고 탄복하였다. 1689(숙종 15)년 학덕으로 천거되어 건원릉(健元陵) 참봉이 되었으나 잠시 부임했다가 돌아왔다. 1691년 익위사부솔(翊衛司副率)에, 1693년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자 왕이친서를 하사하였다. 류후장은 아버지 류만하가 고조부 류성룡의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에서분가하면서 지은 집을 훗날 증축하고 주일재(主一齋, 중요민속문화재 91호)라 불렀다.
이 문집은 류후장의 8세족현손인 석우(奭佑)가주장하여 유고를 모아서 10세손 종하(宗 夏)가 1974년에 석인본으로 간행하였다. 전윤석(金胤錫)이 서문을썼고, 류종하(柳宗夏)가발문을 썼다. 류후장은 문장과 저술에 뜻을 두지 않았고 그나마 지은 글들을 생전에 태워버 려서, 유고에 실린 글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시는 많지 않고 만사(輓詞)이거나 대작인 (代人作)이 대부분이다. 상소문 가운데 세 번의 사직소와 그에 대한 숙종의비답이 회자되었 고, 성혼(成渾)과 이이(李珥), 김장생, 송시열의 배향을 논척하는 세 편의 척향소(斥享疏)는 당시 영남 남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으며, 고조 류성룡을 변무하는장편의 「고조고문충공 부군변무소(高祖考文忠公府君辨誣疏)」는그 논의가 매우 정대하다고 칭송받았다. 서신 가운데 심(心)과 지각(知覺)의 문제를논한 것 등, 성리 논변에 해당하는 몇 편의 글이 있어 당시 철학사 연구의 폭을 넓히는 자료로 의미가있다. 기타 서신과 제문을 통해 당시 영남 남인의 교유와 가학(家學)을 연구하는 자료로 삼을 만하다.